최근 몇 년간 성장을 지속해온 배달시장은 코로나19 사태에도 그 성장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음식 배달 시장규모는 약 20조 원으로 지난해보다 약 17%증가할 전망이다. 배달업 종사자는 약 13만 명으로 추산(2019년 고용노동부 한국노동연구원 발표)된다. 본지는 하루에도 도로와 골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배달라이더들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연재할 계획이다.

첫 배달의 기억
2009년 8월의 어느 날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맥도날드 매장을 찾아간 것은 햄버거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날은 내 생애 첫 배달 알바를 위해 면접을 보기로 한 날이었다. 대학 졸업 직후 대학원 준비에 한창이었던 나는 사실 경제적 여유가 별로 없었다. 공부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선 시급이 센 일자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난 맥도날드를 찾아갔고 내 나이 서른에 처음으로 배달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많은 알바를 해봤지만 배달은 처음이었다.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막연한 두려움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앞으로 내 발이 되어 줄 A4! 잘 부탁한다!’
두려움을 안고 출근한 첫 날. 유니폼과 헬멧, 보호장구 등을 지급받고 매장 밖을 나와서 맞이하게 된 바이크는 50cc 기종인 대림 A4. 차체가 가벼우며 50cc치고는 힘이 좋아 그 당시 배달용으로 인기가 많던 기종이었다. 직장 동료들에게 ‘잘 부탁한다’는 짧은 인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배달 업무를 시작했다.
컴퓨터를 통해 주문이 들어오면 카운터에 있는 크루(매장 내 서비스를 맡는 단기고용직, Crew)가 주문서를 보고 햄버거와 음료를 챙겨주었고, 나는 주문서와 음식이 맞게 챙겨졌는지를 확인하고 음식을 배달가방에 넣었다. 배달 갈 주소도 지도에서 꼼꼼히 확인한 후 배달 가방을 들고서 드디어 대망의 첫 배달을 출발했다.
음식을 싣고 달리는 도로는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모든 차들이 나를 향해 돌진할 것만 같고, 늘 다니던 길도 다른 길인 것만 같고, ‘배달통에 음식은 벌써 식은 건 아닐까?’란 걱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도 잠시, 이내 주문서에 적힌 주소지에 도착했다. 어색한 인사와 함께 떨리는 손으로 손님과는 눈도 못 마주친 체 음식을 건네주고 나니 드디어 첫 임무가 끝이 났다.
그렇게 어색한 첫 배달을 마치고 다시 매장으로 복귀! ‘뭐야? 별 거 없네? 배달, 생각보다 쉽군!’. 열심히만 하면 되겠구나 생각하고 그렇게 한동안 별 문제없이 잘 적응해 나갔다. 처음 하는 일인데도 곧잘 하다 보니 동료 라이더들과도 금세 가까워졌고, 매니저들도 그런 나를 좋게 봐주고 칭찬해 주었다. 배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점점 사라져 갔고,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했다.
깨달음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사고가 발생한다. 배달을 하면서 배달원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어느 순간 ‘확~!’ 깨닫게 되는 일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스마트폰이 일반화되기 전이라 핸드폰으로 지도를 검색할 수 없었기에 지도를 완전히 외우고 출발해야 했다. 하지만 배달하다 보면 지도를 잘 확인하고 가도 헤매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당시 배달구역 중 종로 명륜3가 쪽은 소위 달동네라 불리는 곳이었다. 언덕도 언덕이지만 그 지역은 1,000여 가구가 넘는 집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고 좁을 골목이 많은 곳이라 사실 지도를 외우고 가도 헤매기 일쑤였다.
또한 주소가 안 써진 오래된 건물들이 많은데 주소가 안 나와 있으면 정확히 찾아가서도 맞게 찾아왔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때론 고객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기도 하지만 설명을 들어도 못 찾고 헤매는 경우가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집을 잘 못 찾아서 시간이 지체되는 경우 대체적으로는 고객들도 별 말없이 넘어가 주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화를 내는 손님도 있기 마련이다.
이 날도 집을 못 찾고 헤매느라 시간이 좀 늦어졌다. 무거운 마음으로 벨을 눌렀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반말과 함께 육두문자가 날아왔다. 나는 ‘죄송합니다’란 말과 함께 건낸 음식을, 고객은 음식 배달 비용을 준 뒤, 무엇 때문에 배달이 늦었는지 설명할 새도 없이 문은 그대로 ‘쾅!’ 하고 닫혀 버렸다.
그 닫힌 문을 바라보며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온갖 생각이 다 스쳐지나 가면서 내 자신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 배달이란 이런 거구나’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배달을 하면서 별 일을 다 겪어 봤지만 손님한테 욕 듣는 것만큼 충격적인 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수년간 배달하면서 이제는 반말과 욕설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더 비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반동(反動)
그날 들었던 반말과 욕설이 트라우마로 남았을까? 그 이후로는 항상 빨리 가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골이 아닌 도심에서 배달을 한다면 빨리 가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결국 도로교통법을 어기는 것! 나도 배달 일을 하기 전에는 배달을 시키면서 ‘빨리 갖다 주세요’를 무심코 내뱉곤 했는데 그게 얼마나 몰지각한 말인지 배달을 직접 하기 전까진 알지 못 했다.
유명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라이더로 한참 일하던 어느 날,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정지선과 신호를 지켜가며 안전하게 배달을 다녀왔더니 매니저가 ‘라이더님 뭐 하다 이제 와요? 혹시 놀다 왔어요?’라며 왜 놀다 오냐고 하는 것이다. 나는 법규를 준수하면서 안전하게 배달을 하고 왔지만 매니저는 내가 놀다가 늦게 온 것으로 생각했다. 순수하게 ‘법규를 지키며, 안전 라이딩을 했다’는 나의 말을 매니저는 믿어주지 않았다.
차가 꽉 막힌 도심 속 도로에서 교차로 한번을 지나기 위해선 신호를 두, 세 번 받아야 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업무환경이다 보니 대부분의 라이더들은 신호 두, 세 번을 ‘고지식하게’ 기다리지 않는다. 신호를 한 번에 바로 지나가, 신속한 배달을 하기 위해 차 사이를 곡예 하듯 지나가 제일 앞 선으로 간다. 물론 정지선은 지켜질 리 없다. 신호마저 어긴다면 고객에게 도착하는 시간은 더욱 빨라질 수 있다.
복잡한 도심에서 법규와 규정속도를 지켜가며 안전하게 배달을 다녀왔더니 나는 ‘근무 중에 놀다 온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질책을 받은 후 배달관련 업무 공간의 한 켠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써 있었다.
‘라이더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나는 그 문장 속 라이더에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았다.
조봉규 라이더
국내최초로 ‘배달라이더 노동단체’로 인정받은 ‘라이더유니온’의 부산 지부장이다. 배달 라이더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는 라이더 유니온은 현재 전국적으로 약 350여 명의 조합원 수를 보유하고 있다. 조봉규 라이더는 국내 유명 프랜차이즈 직고용 라이더로 약 4년. 배달대행 라이더로 약 4년간 근무했으며 현재도 배달대행 라이더로 근무하고 있다.
글/조봉규(라이더유니온 부산 지부장)
#한국이륜차신문 #모터사이클뉴스 #나는배달라이더다 #라이더유니온
한국이륜차신문 369호 / 2020.12.16~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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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성장을 지속해온 배달시장은 코로나19 사태에도 그 성장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음식 배달 시장규모는 약 20조 원으로 지난해보다 약 17%증가할 전망이다. 배달업 종사자는 약 13만 명으로 추산(2019년 고용노동부 한국노동연구원 발표)된다. 본지는 하루에도 도로와 골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배달라이더들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연재할 계획이다.
첫 배달의 기억
2009년 8월의 어느 날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맥도날드 매장을 찾아간 것은 햄버거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날은 내 생애 첫 배달 알바를 위해 면접을 보기로 한 날이었다. 대학 졸업 직후 대학원 준비에 한창이었던 나는 사실 경제적 여유가 별로 없었다. 공부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해선 시급이 센 일자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난 맥도날드를 찾아갔고 내 나이 서른에 처음으로 배달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많은 알바를 해봤지만 배달은 처음이었다.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막연한 두려움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앞으로 내 발이 되어 줄 A4! 잘 부탁한다!’
두려움을 안고 출근한 첫 날. 유니폼과 헬멧, 보호장구 등을 지급받고 매장 밖을 나와서 맞이하게 된 바이크는 50cc 기종인 대림 A4. 차체가 가벼우며 50cc치고는 힘이 좋아 그 당시 배달용으로 인기가 많던 기종이었다. 직장 동료들에게 ‘잘 부탁한다’는 짧은 인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배달 업무를 시작했다.
컴퓨터를 통해 주문이 들어오면 카운터에 있는 크루(매장 내 서비스를 맡는 단기고용직, Crew)가 주문서를 보고 햄버거와 음료를 챙겨주었고, 나는 주문서와 음식이 맞게 챙겨졌는지를 확인하고 음식을 배달가방에 넣었다. 배달 갈 주소도 지도에서 꼼꼼히 확인한 후 배달 가방을 들고서 드디어 대망의 첫 배달을 출발했다.
음식을 싣고 달리는 도로는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모든 차들이 나를 향해 돌진할 것만 같고, 늘 다니던 길도 다른 길인 것만 같고, ‘배달통에 음식은 벌써 식은 건 아닐까?’란 걱정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도 잠시, 이내 주문서에 적힌 주소지에 도착했다. 어색한 인사와 함께 떨리는 손으로 손님과는 눈도 못 마주친 체 음식을 건네주고 나니 드디어 첫 임무가 끝이 났다.
그렇게 어색한 첫 배달을 마치고 다시 매장으로 복귀! ‘뭐야? 별 거 없네? 배달, 생각보다 쉽군!’. 열심히만 하면 되겠구나 생각하고 그렇게 한동안 별 문제없이 잘 적응해 나갔다. 처음 하는 일인데도 곧잘 하다 보니 동료 라이더들과도 금세 가까워졌고, 매니저들도 그런 나를 좋게 봐주고 칭찬해 주었다. 배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점점 사라져 갔고,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 했다.
깨달음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사고가 발생한다. 배달을 하면서 배달원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어느 순간 ‘확~!’ 깨닫게 되는 일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스마트폰이 일반화되기 전이라 핸드폰으로 지도를 검색할 수 없었기에 지도를 완전히 외우고 출발해야 했다. 하지만 배달하다 보면 지도를 잘 확인하고 가도 헤매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당시 배달구역 중 종로 명륜3가 쪽은 소위 달동네라 불리는 곳이었다. 언덕도 언덕이지만 그 지역은 1,000여 가구가 넘는 집들이 빼곡하게 모여 있고 좁을 골목이 많은 곳이라 사실 지도를 외우고 가도 헤매기 일쑤였다.
또한 주소가 안 써진 오래된 건물들이 많은데 주소가 안 나와 있으면 정확히 찾아가서도 맞게 찾아왔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때론 고객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기도 하지만 설명을 들어도 못 찾고 헤매는 경우가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집을 잘 못 찾아서 시간이 지체되는 경우 대체적으로는 고객들도 별 말없이 넘어가 주시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화를 내는 손님도 있기 마련이다.
이 날도 집을 못 찾고 헤매느라 시간이 좀 늦어졌다. 무거운 마음으로 벨을 눌렀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반말과 함께 육두문자가 날아왔다. 나는 ‘죄송합니다’란 말과 함께 건낸 음식을, 고객은 음식 배달 비용을 준 뒤, 무엇 때문에 배달이 늦었는지 설명할 새도 없이 문은 그대로 ‘쾅!’ 하고 닫혀 버렸다.
그 닫힌 문을 바라보며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온갖 생각이 다 스쳐지나 가면서 내 자신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 배달이란 이런 거구나’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배달을 하면서 별 일을 다 겪어 봤지만 손님한테 욕 듣는 것만큼 충격적인 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수년간 배달하면서 이제는 반말과 욕설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더 비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반동(反動)
그날 들었던 반말과 욕설이 트라우마로 남았을까? 그 이후로는 항상 빨리 가는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골이 아닌 도심에서 배달을 한다면 빨리 가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결국 도로교통법을 어기는 것! 나도 배달 일을 하기 전에는 배달을 시키면서 ‘빨리 갖다 주세요’를 무심코 내뱉곤 했는데 그게 얼마나 몰지각한 말인지 배달을 직접 하기 전까진 알지 못 했다.
유명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라이더로 한참 일하던 어느 날,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정지선과 신호를 지켜가며 안전하게 배달을 다녀왔더니 매니저가 ‘라이더님 뭐 하다 이제 와요? 혹시 놀다 왔어요?’라며 왜 놀다 오냐고 하는 것이다. 나는 법규를 준수하면서 안전하게 배달을 하고 왔지만 매니저는 내가 놀다가 늦게 온 것으로 생각했다. 순수하게 ‘법규를 지키며, 안전 라이딩을 했다’는 나의 말을 매니저는 믿어주지 않았다.
차가 꽉 막힌 도심 속 도로에서 교차로 한번을 지나기 위해선 신호를 두, 세 번 받아야 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업무환경이다 보니 대부분의 라이더들은 신호 두, 세 번을 ‘고지식하게’ 기다리지 않는다. 신호를 한 번에 바로 지나가, 신속한 배달을 하기 위해 차 사이를 곡예 하듯 지나가 제일 앞 선으로 간다. 물론 정지선은 지켜질 리 없다. 신호마저 어긴다면 고객에게 도착하는 시간은 더욱 빨라질 수 있다.
복잡한 도심에서 법규와 규정속도를 지켜가며 안전하게 배달을 다녀왔더니 나는 ‘근무 중에 놀다 온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질책을 받은 후 배달관련 업무 공간의 한 켠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이렇게 써 있었다.
‘라이더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나는 그 문장 속 라이더에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았다.
조봉규 라이더
글/조봉규(라이더유니온 부산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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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륜차신문 369호 / 2020.12.16~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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