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솔, 나는 레이서다_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험, 내구 레이스

2021-09-13

지금까지 주로 레이스 라이더로서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왔지만, 사실 로드 레이스는 단순히 달리는 행위 이외에도 매우 입체적이고 다양한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팀 구성원 각각의 역할과 분담, 소통과 협업, 기술 규정과 운영 규정의 이해, 그에 따른 보이지 않는 첨예한 경쟁, 그것을 바탕으로 연습-예선-결승으로 이어지는 레이스 위크의 기승전결은 가히 픽션을 능가하는 논픽션,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을 압축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이벤트가 바로 내구 레이스다. 이 세계에서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다면 내구 레이스는 매우 좋은 개론 수업이 될뿐더러, 라이더의 기량과 경험치를 키우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스프린트와는 다른 엔듀런스의 특성


내구 레이스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머신과 라이더의 한계를 시험하는 모터스포츠 장르다.


스프린트 레이스가 10랩 ~ 20랩을 주행해 대략 25분 내외로 결과가 나오는 것과 달리, 내구 레이스는 적게는 4시간에서 많게는 8시간을 달리며 주행하는 랩 수는 수백 랩에 달한다.


자동차 계에서는 ‘르망 24시간’이 유명하고 모터사이클 계에서는 ‘스즈카 8시간’이 손에 꼽히는 월드 클래스 이벤트로 대표된다. 대한민국에도 몇몇의 내구 레이스가 존재하며, 가장 오래되고, 전문적이고, 여전히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레이스는 'KSEF 6H'다. 영암 국제자동차경주장 상설 서킷을 무대로 올 해 8월 8일에 11회 차 이벤트를 앞두고 있다.


이벤트의 크기와 준비할 내용의 특수성 덕분에 1년에 한 번, 가장 더운 여름에 개최되는 것이 특징이다. 400cc 미만 쿼터급 클래스를 기준으로 평균 80여 팀이 참가 접수하며, 우승권 팀은 6시간 동안 보통 220랩 정도를 달린다.


머신의 준비


라이더는 최대 4인까지 구성해 교체가 가능하지만 머신은 기본적으로 1대를 운용하는 것으로 한다. 연중 가장 더운 날에 6시간 연속으로 트랙을 달리는 일은 머신에 굉장히 큰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에 사전에 엔진 오버홀 및 모든 부위를 점검해 신차에 준하는 상태로 준비하는 것이 기본이다. 최대출력을 추구하기보다는 빅 라디에이터, 에어샤워(도풍판) 등 냉각효율을 개선해 내구성 위주로 차량을 세팅한다.


오히려 주행 중에는 차량의 냉각이 지속되지만 잠시 멈춘 사이에 온도가 치솟기 때문에, 주유 작업 중 엔진이 과열되지 않도록 적절히 식혀주거나 엔진 온도의 마진을 미리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피트 스톱해 주유 및 선수 교체를 마친 후 과열로 인해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또한 드라이브 체인이 끊어지거나 브레이크 패드가 전량 소모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므로 모든 소모품을 경기 시작 직전에 신품 상태로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최근 쿼터 클래스 머신 출력의 상향평준화로 레이스 중간 타이어 교체의 필요성 또한 거론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우승권 팀과 그렇지 않은 팀의 차이


시상대 진입을 노리는 팀에서 반드시 준비해야 할 인원이 바로 사인 보드를 제대로 낼 줄 아는 노련한 스태프다.


주행 중인 우리 차량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모든 랩을 라이더와 함께 하며 사인 보드를 통해 라이더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뜻밖에 발생하는 불시의 이벤트를 지체 없이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땡볕에서 한 사람이 6시간을 서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이 역시 교체할 인원이 필요하다.


이어서 우리 차량을 잘 아는 훌륭한 정비사와 충분한 예비 부품 역시 필수적이다. 피트 월에 서 있던 사인 보더가 사소한 기술 결함이나 문제 상황을 파악해 즉시 팀에 전달했을 때, 정비사를 비롯한 팀 크루는 해당 랩에 머신이 피트인 할 것을 대비해 신속하게 모든 예비 부품과 공구를 준비하고 머신을 맞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단지 30초라도 라이더가 효과적으로 쉴 수 있도록 음료와 냉각 등 매니지먼트가 뒤따른다면 더욱 좋다.


라이더의 구성에 있어서도 상위권 팀은 빠르고 노련하고 체력이 좋은 단 2인의 라이더로 꾸린다. 레이스 스타트 후 3시간, 4시간째에도 여전히 당일에 처음 코스인 하는 라이더가 있다면, 그만큼 사고 발생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취미로 참가하는 경우라면 우애가 좋은 4명이서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면 된다.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연료소비량을 미리 측정해 피트-인 횟수와 시점을 최대한 타이트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피트-인 작업 자체가 주행 시간을 침해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가능한 연료 탱크 용량을 최대한으로 사용하고 피트-인 횟수를 줄이는 것이 좋다. 욕심을 내거나 계산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 주행 중인 머신의 연료가 모두 소모되어 피트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므로 지혜롭게 선택해야 한다.


장시간 연속 주행의 성과


딱히 내구 레이스 자체에 관심이 없는 라이더라 하더라도 스킬 업 차원에서 참가해보기를 권장한다.


일반적인 스프린트 레이스나 트랙데이 세션은 20분 내외를 기준으로 달리기 때문에 평소에는 그 이상의 장시간 주행을 지속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반면, 내구 레이스는 비록 레이스 중이지만 어쨌든 1시간가량 연속으로 달릴 수 있기 때문에 주행에 온전히 집중하여 리듬을 익히기 좋다.


연속 주행 30분을 넘어 지긋지긋하게 달리다 보면 어느새 북적이는 주변 상황에 적응하여 잡생각이 사라지고 집중하게 된다. 트랙 자체의 굵직한 리듬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그렇게 되면 전에 몰랐던 미묘한 차이를 캐치할 수 있다. 노면 거칠기의 차이, 코스 기울어짐의 각도, 아주 작은 범프, 시선을 고정할 포인트가 하나, 하나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모터사이클이 달리는 트랙 자체가 많지 않다. 레이스나 트랙데이 이벤트가 꾸준히 열리는 트랙은 인제 스피디움, 영암 F-1 상설 트랙 두 가지 뿐이다. 개개인의 재능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반복해 상세히 외우고 디테일을 올려가다 보면 나의 속도는 반드시 빨라지기 마련이다.

 

라떼는? 모든 치열한 내구 레이스의 기억


지금까지 다양한 내구 레이스에 총 7번 라이더로 출전했고, 직접 달리지 않은 레이스에도 여러 번 스태프로 참가한 덕분에 대한민국 내구 레이스 현장의 감동적이고 충격적인 여러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그 중 직접 겪었던 아픈 기억 하나를 에피소드로 풀어본다.


2016년 KSEF에 ADV 클래스로 출전했을 때의 일이다. 그 해 우리 팀은 애초에 우승을 목표로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 머신과 선수와 크루의 구성이 완벽했다. 레이스 당일, 우리 팀은 스타트 직후부터 5시간 경과 시점까지 1위를 유지했다. 오랜 기간 준비한 만큼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그렇게 레이스 종료를 1시간 앞둔 오후 3시 경, 마지막 주유와 선수 교대를 위해 피트-인 했다. 내가 달릴 차례였다. 바로 그 때 앞서 달린 선수가 브레이크 터치 감이 이상하다는 얘기를 했다. 어제 저녁 신품으로 교환해둔 앞 브레이크 패드가 모두 닳아 있었다. 긴급히 패드 교환을 시도했지만 시간이 지연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7위 근처의 저조한 성적에 머물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글/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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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륜차신문 378호 / 2021.5.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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