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희의 ‘바로 그 장면’_굿바이 레닌 (2003년 作)

2023-11-15

동독을 가르던 바로 그 바이크


이 바이크, 저 바이크 타보고픈 욕심이 사라진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시간과 체력이 모자라 바이크 투어조차 끊다시피 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멋있는 바이크 앞에선 여전히 신나고 즐겁습니다. 지금은 구할 수 없는 바이크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영화에는 오직 동독에서만 허용됐던 바이크가 등장합니다.

 

찬란한 조국에 대한 믿음


1978년, 소년 알렉스는 동독이 배출한 첫 우주비행사를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봅니다.


시간이 흘러 1989년, 알렉스는 현재 TV 수리기사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 크리스티아네가 심장마비로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집니다. 크리스티아네가 깨어나지 못하는 사이 독일 정치는 급변했습니다.


동서독을 갈라놨던 베를린 장벽이 철거되고 두 개의 독일은 하나의 독일이 됐습니다. 고르바초프, 헬무트 같은 역사책에 남을 정치인들의 이름과 당시 뉴스 영상들이 영화 속에서 소환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크리스티아네가 깨어납니다. 거동 못할 만큼 건강이 나쁘고 절대 안정이 필요한 상황. 약간만 놀라도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는 의사의 경고에 알렉스는 ‘연극’을 결심합니다. 동독 체제에 강력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어머니가 행여나 놀랄까, 그간 독일의 변화를 통째로 숨기기로 한 겁니다.


당연히 쉽지 않습니다. 동서독 통일 후 동독은 빠르게 자본주의화가 진행됐습니다. 많은 사람이 기존 일자리를 잃는 대신 ‘버거킹’ 같은 자본주의 기업에 취직했습니다. 수많은 동독 기업들이 도산하는 바람에 마트 매대에는 서독 제품들만 남았습니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피클(물론 동독 브랜드입니다)조차 구하지 못하게 된 겁니다.


어머니를 위한 혼신의 연기



그래서 알렉스는 동독제 피클 병을 간신히 구해다 잘 소독한 후 서독 제품을 담아 어머니에게 내밉니다.


라디오를 듣고 싶은 어머니에게 “고장났다”는 핑계를 대기도 합니다. 거동할 수 없어 방에만 앉아 있는 어머니는 TV를 보고 싶어합니다. 알렉스는 국립도서관에서 과거의 뉴스프로그램 녹화 테이프를 구해다 틀어줍니다. 크리스티아네는 실시간 방송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알렉스가 옆 방에서 시간 맞춰 비디오테이프를 틀어주고 있는 겁니다.


이마저 한계에 부딪히자 영화감독이 꿈인 친구를 섭외해 가짜 뉴스를 만들기에 이릅니다. 이를테면 창밖에 걸린 코카콜라(자본주의 기업) 현수막을 보고 어머니가 의아해하자, 코카콜라가 동독 정부와 손을 잡았다는 등의 가짜 뉴스를 촬영해 보여주는 식입니다.


동분서주하는 알렉스에게는 다행히 발이 되어줄 스쿠터 한 대가 있습니다. 당시 동독에서 생산되고 판매됐던 ‘심슨 슈발베 KR51’입니다.


<굿바이 레닌> 제작진은 1980~ 1990년대 동독을 재현하기 위해 각종 세트와 소품에 매우 공을 들였다고 하는데, 심슨 슈발베 스쿠터 역시 그 일부분입니다.


당시 ‘동독에서만’ 타고 다녔던 동독 제조사 물건이니까요. 복고적인 디자인과 색감의 이 스쿠터는 알렉스의 연극에 큰 역할을 합니다.


심슨 슈발베는 지금도 독일 올드 바이크 마니아들 사이에서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이 무너져도 괜찮아


연극이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하늘에는 서구 기업의 브랜드 로고를 대문짝만하게 단 비행선이 날아다니고, 크리스티아네를 찾아온 친구들은 아무래도 연기를 잘못하니까요. 그렇지만 모두 크리스티아네의 건강을 위해 혼신의 연기를 펼칩니다.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당 지도부의 이름을 거론하는가 하면 다 같이 사회주의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요.


<굿바이 레닌>은 이상한 이야기지만 한국인들에게는 남 일 같지가 않습니다.


남북한이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굿바이 레닌>만큼의 혼란을 겪을 테니까요. 동독인들이 집을 버리고 서독으로 떠났듯, 북한 동포들은 남한으로 올 겁니다. 그리고 알렉스가 그랬듯 자신을 지탱해온 사회와 시스템과 문화가 허공으로 흩어지는 기분을 맛보겠죠. 남한 사람들은 그 정도가 덜하겠지만 그럼에도 알렉스의 심정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를 위한 필사적인 연극은, 아마도 알렉스 스스로 혼란스러운 마음을 부여잡는 수단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크리스티아네 역할은 실제 동독 출신 배우인 카트린 자스가 맡았습니다. 알렉스 역의 다니엘 브륄은 2013년 영화 <러시:더 라이벌>에서 불굴의 레이서 ‘니키 라우다’ 역할로도 인상 깊었던 배우입니다.


영화는 종종 웃음을 안겨주지만, 전반적으로 진지합니다. 독일에서는 600만 명 넘는 관객을 모을 만큼 대흥행했다고 합니다. 알렉스가 어떻게 연극을 마무리할지 궁금하다면, 사회주의 국가를 배경으로 달리는 노란색 스쿠터의 이미지에 끌리신다면 감상을 권해봅니다.

 

영화 속 그 바이크

심슨 슈발베 KR51


동독 무기 회사였던 심슨에서 1960년~1980년대까지 생산·판매한 모델입니다.


49.9cc 엔진을 장착한 스쿠터로, 최고속도는 시속 60km. 이탈리아에선 베스파가 ‘국민 스쿠터’였듯, 동독에서는 심슨 슈발베가 최고였다고 합니다.


심슨은 1986년까지 슈발베를 생산했고 이후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지만 2018년 독일 전기스쿠터 회사인 고벡스가 전기스쿠터로 되살려냅니다.

 

유주희(서울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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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륜차신문 438호 / 2023.11.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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