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지금, 모터사이클 여행을 떠납니다
저의 TMI(Too Much Information, 과한 정보)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저도 꼬마 시절에는 여자아이로서 교육받은 대로 바비인형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옷 갈아입히기, 머리 땋아주기 같은 놀이를 했고 자연스럽게 ‘인형의 집’도 갖고 싶어졌습니다. 방 몇 개와 욕실, 주방, 가구와 소품이 갖춰진 2, 3층짜리 인형의 집 말입니다.
그러나 저의 부모님은 비싸다는 이유로 사주지 않았고 이제 어느덧 중년이 된 지금(UN의 기준대로라면 여전히 청년으로 분류된다고 덧붙여 봅니다)까지도 장난감 코너에서 인형의 집을 보면 설렙니다. 시간이 없어서 몇 개 못 만들어보긴 했지만, 가구와 집기가 잔뜩 들어있는 레고 건물 시리즈들도 좋아합니다.
어린 시절 못 이룬 꿈은 이렇게나 강렬하게 사람을 뒤흔듭니다. 넷플릭스 영화 ‘올 더 플레이스’에서 가보와 페르난도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긴 바이크 여행을 떠나는 모습도 그래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산미겔에서 아카풀코까지

가보와 페르난도는 15년 만에 재회했습니다. 장소는 아버지의 장례식장. 가보는 장례식장마저 지각한 페르난도의 뺨을 대차게 때리고 결국 난투극이 이어집니다. 날은 저물기 마련이고, 이날 저녁 둘은 아주 오랜만에 식탁에 마주 앉습니다. 그러나 오가는 것은 날선 대화뿐입니다. 페르난도는 오래전 멕시코를 떠나 싱가포르 금융계에서 아주 바쁘게 일해 왔습니다.
“아파트에 발코니가 딸린 것도 한 달이 지나서야 알 정도”로요. 가보는 아버지 곁을 지키며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해 왔습니다. 이혼, 아버지의 병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티면서 말입니다.
다행히 둘은 낮에 치고받은 것 치고는 금세 마음을 엽니다. 어렸을 적엔 아주 우애가 깊은 남매였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의 아지트였던 방을 탐방하던 페르난도는 독한 술에 힘입어, 상중임에도 걸려오는 회사의 전화를 무시할 만큼 대담해집니다. 추억 여행은 어렸을 적 숨겨둔 여행지도 발굴로 이어집니다. 18세가 되면 산미겔에서 아카풀코까지 바이크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던 그 마음, 여행 중 서로의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기로 결심했을 때의 미소가 순식간에 되살아나고 곧바로 바이크의 시동을 겁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보와 페르난도에게 각각 사주었던 멕시코 국산 브랜드 ‘카라벨라’의 바이크입니다. 현실에서 헬멧도 없이 술에 취한 채로 바이크를 타면 절대로 안 되겠지만, 영화 속에서 밤의 멕시코 골목길을 누비는 둘의 얼굴은 어린아이들처럼 반짝입니다.
즉흥적 투어에 대리만족

그리고 예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둘은 검은 상복 차림의 맨몸 그대로 아카풀코를 향해 출발합니다.
술에 취해 신난 어른들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원래대로라면 페르난도는 이튿날 다시 싱가포르로 떠났을 테고 가보는 정비소에서 자동차를 고쳤겠지만 둘은 이미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영화를 보는 라이더들의 머릿속에는 비행기 표값, 수리가 끝난 차를 기다리는 손님들의 마음, 세면도구나 갈아입을 옷 따위가 스치지만, 어느새 가보와 페르난도처럼 웃음을 짓게 됩니다. 라이딩 기어가 하나 없이 떠나는 바이크 투어는 안 될 말이지만 훌훌 떠나는 등장인물들의 객기가 한편으로는 부럽습니다.
여행길에서 많은 장소와 사람들을 마주칩니다. 가보는 13년 만에 설렘을 안겨주는 남자를 만나기도 하고, 의심스러운 히치하이커들을 태워주기도 합니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둘의 복장은 점점 자유로워지고 그동안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됩니다.
라이더로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자 아주 모범적으로 바이크의 효능을 보여주는 전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이크 여행의 생생한 기쁨

남미 지역 바이크 투어가 꿈인 분들에게는 꼭 추천하고 싶은 영화입니다.
덥고 습한 공기, 노천 식당의 들뜬 분위기, 남은 현금을 계산해보는 일정 중간의 자투리 시간처럼 바이크 여행의 기쁨이 잘 담겼습니다. 카메라에 비춰지는 멕시코의 낯선 풍경을 직접 마주하면 틀림없이 더 아름답겠죠.
영화의 전개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중간중간 1990년대 영화 같은 BGM도 들려오긴 하지만 라이더들에게는 자신 있게 추천하고픈 영화입니다. 바이크 함량 80% 정도의 고순도 바이크 영화니까요.
가보와 페르난도 역의 두 배우는 영화 내내 직접(일부 장면에서는 대역 배우가 대신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바이크를 운전합니다. 투어에 목마른 시점에 이 영화를 본다면 영화 속 남매처럼 즉흥적인 여행을 계획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속 그 바이크
카라벨라 블래스터200

카라벨라는 1964년 설립된 멕시코 모터사이클 제조사입니다.
자전거 회사의 계열사였는데, 한때 멕시코 모터사이클 시장의 80%를 차지할 정도였지만 자금난을 겪으면서 1987년 모터사이클 생산을 중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히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오너가 인수했고, 현재 연간 생산량 5만 대 이상에 전국 판매망도 100곳 넘게 보유하고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매의 바이크는 정말 추억이 담긴 클래식 바이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2010년대 이후 출시된 최신 모델들입니다.
가보가 타는 ‘블래스터 200’은 스크램블러 스타일의 200cc 바이크로 14hp/ 8,500rpm의 최고출력을 냅니다. 페르난도의 ‘더티잭’은 250cc의 멋들어진 카페 레이서로 최고출력은 17.2hp/8,000rpm입니다.
한국에서 만나볼 일은 없겠지만 멕시코에 가게 된다면 흔히 마주칠 수 있을 겁니다.
유주희 (서울경제신문 기자)
#한국이륜차신문 #모터사이클뉴스 #올더플레이스 #카라벨라 #블래스터200 #더티잭
한국이륜차신문 455호 / 2024.7.16~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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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모터사이클 여행을 떠납니다
저의 TMI(Too Much Information, 과한 정보)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저도 꼬마 시절에는 여자아이로서 교육받은 대로 바비인형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옷 갈아입히기, 머리 땋아주기 같은 놀이를 했고 자연스럽게 ‘인형의 집’도 갖고 싶어졌습니다. 방 몇 개와 욕실, 주방, 가구와 소품이 갖춰진 2, 3층짜리 인형의 집 말입니다.
그러나 저의 부모님은 비싸다는 이유로 사주지 않았고 이제 어느덧 중년이 된 지금(UN의 기준대로라면 여전히 청년으로 분류된다고 덧붙여 봅니다)까지도 장난감 코너에서 인형의 집을 보면 설렙니다. 시간이 없어서 몇 개 못 만들어보긴 했지만, 가구와 집기가 잔뜩 들어있는 레고 건물 시리즈들도 좋아합니다.
어린 시절 못 이룬 꿈은 이렇게나 강렬하게 사람을 뒤흔듭니다. 넷플릭스 영화 ‘올 더 플레이스’에서 가보와 페르난도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긴 바이크 여행을 떠나는 모습도 그래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산미겔에서 아카풀코까지
가보와 페르난도는 15년 만에 재회했습니다. 장소는 아버지의 장례식장. 가보는 장례식장마저 지각한 페르난도의 뺨을 대차게 때리고 결국 난투극이 이어집니다. 날은 저물기 마련이고, 이날 저녁 둘은 아주 오랜만에 식탁에 마주 앉습니다. 그러나 오가는 것은 날선 대화뿐입니다. 페르난도는 오래전 멕시코를 떠나 싱가포르 금융계에서 아주 바쁘게 일해 왔습니다.
“아파트에 발코니가 딸린 것도 한 달이 지나서야 알 정도”로요. 가보는 아버지 곁을 지키며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해 왔습니다. 이혼, 아버지의 병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티면서 말입니다.
다행히 둘은 낮에 치고받은 것 치고는 금세 마음을 엽니다. 어렸을 적엔 아주 우애가 깊은 남매였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의 아지트였던 방을 탐방하던 페르난도는 독한 술에 힘입어, 상중임에도 걸려오는 회사의 전화를 무시할 만큼 대담해집니다. 추억 여행은 어렸을 적 숨겨둔 여행지도 발굴로 이어집니다. 18세가 되면 산미겔에서 아카풀코까지 바이크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던 그 마음, 여행 중 서로의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기로 결심했을 때의 미소가 순식간에 되살아나고 곧바로 바이크의 시동을 겁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보와 페르난도에게 각각 사주었던 멕시코 국산 브랜드 ‘카라벨라’의 바이크입니다. 현실에서 헬멧도 없이 술에 취한 채로 바이크를 타면 절대로 안 되겠지만, 영화 속에서 밤의 멕시코 골목길을 누비는 둘의 얼굴은 어린아이들처럼 반짝입니다.
즉흥적 투어에 대리만족
술에 취해 신난 어른들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요. 원래대로라면 페르난도는 이튿날 다시 싱가포르로 떠났을 테고 가보는 정비소에서 자동차를 고쳤겠지만 둘은 이미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영화를 보는 라이더들의 머릿속에는 비행기 표값, 수리가 끝난 차를 기다리는 손님들의 마음, 세면도구나 갈아입을 옷 따위가 스치지만, 어느새 가보와 페르난도처럼 웃음을 짓게 됩니다. 라이딩 기어가 하나 없이 떠나는 바이크 투어는 안 될 말이지만 훌훌 떠나는 등장인물들의 객기가 한편으로는 부럽습니다.
여행길에서 많은 장소와 사람들을 마주칩니다. 가보는 13년 만에 설렘을 안겨주는 남자를 만나기도 하고, 의심스러운 히치하이커들을 태워주기도 합니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둘의 복장은 점점 자유로워지고 그동안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됩니다.
라이더로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자 아주 모범적으로 바이크의 효능을 보여주는 전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이크 여행의 생생한 기쁨
덥고 습한 공기, 노천 식당의 들뜬 분위기, 남은 현금을 계산해보는 일정 중간의 자투리 시간처럼 바이크 여행의 기쁨이 잘 담겼습니다. 카메라에 비춰지는 멕시코의 낯선 풍경을 직접 마주하면 틀림없이 더 아름답겠죠.
영화의 전개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중간중간 1990년대 영화 같은 BGM도 들려오긴 하지만 라이더들에게는 자신 있게 추천하고픈 영화입니다. 바이크 함량 80% 정도의 고순도 바이크 영화니까요.
가보와 페르난도 역의 두 배우는 영화 내내 직접(일부 장면에서는 대역 배우가 대신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바이크를 운전합니다. 투어에 목마른 시점에 이 영화를 본다면 영화 속 남매처럼 즉흥적인 여행을 계획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속 그 바이크
카라벨라 블래스터200
카라벨라는 1964년 설립된 멕시코 모터사이클 제조사입니다.
자전거 회사의 계열사였는데, 한때 멕시코 모터사이클 시장의 80%를 차지할 정도였지만 자금난을 겪으면서 1987년 모터사이클 생산을 중단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히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오너가 인수했고, 현재 연간 생산량 5만 대 이상에 전국 판매망도 100곳 넘게 보유하고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매의 바이크는 정말 추억이 담긴 클래식 바이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2010년대 이후 출시된 최신 모델들입니다.
가보가 타는 ‘블래스터 200’은 스크램블러 스타일의 200cc 바이크로 14hp/ 8,500rpm의 최고출력을 냅니다. 페르난도의 ‘더티잭’은 250cc의 멋들어진 카페 레이서로 최고출력은 17.2hp/8,000rpm입니다.
한국에서 만나볼 일은 없겠지만 멕시코에 가게 된다면 흔히 마주칠 수 있을 겁니다.
유주희 (서울경제신문 기자)
#한국이륜차신문 #모터사이클뉴스 #올더플레이스 #카라벨라 #블래스터200 #더티잭
한국이륜차신문 455호 / 2024.7.16~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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