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러시아의 바이크, 우랄
지난번에 ‘이스턴 프라미스’를 ‘바이크 영화’라고 살짝 소개드렸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턴 프라미스’ 에서 바이크는 잊으려면 잊을 수 있을 법한 수준으로만 등장하니까요. 하지만 영화 자체가 워낙 명작인 데다 라이더들이 좋아할 만한 감성이라 소개해 봅니다.
‘이스턴 프라미스’의 무대는 영국 런던입니다. 하지만 주요 인물들은 런던에 뿌리를 내린 러시아 마피아들이죠. 음침한 런던의 분위기, 비정한 마피아들의 세계, 영화 초반부터 등장하는 잔인한 살인 장면 덕분에 ‘무간도’나 ‘신세계’, ‘대부’ 같은 마피아·느와르 영화 마니아라면 단박에 마음에 드실 겁니다.(이하 스포일러 없음).
어쩌다 마주친 마피아의 세계

영화는 주인공 ‘안나’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조산사인 ‘안나’는 러시아인인 아버지로부터 ‘우랄 솔로’ 바이크를 물려받아 타는 클래식 바이크 라이더이기도 합니다.
그는 아기를 낳다 죽은 14살 아이 ‘타티아나’의 일기를 입수하게 됩니다. 러시아어를 못 하는 그는 우연히 러시아 식당 주인인 ‘세미온’을 만나 번역을 부탁하게 되죠. 하지만 ‘세미온’은 ‘타티아나’를 인신매매하고, 성폭행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입니다. 런던 일대 러시아 마피아 조직의 핵심 인물이거든요.
여기서 운전수인 ‘니콜라이’와 ‘세미온’의 아들인 ‘키릴’이 등장합니다. ‘키릴’은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을 아들이지만 머리도, 배짱도, 끈기도 부족합니다. 그런 주제에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픈 열등감만 가득합니다. 그런데 ‘키릴’의 절친이기도 한 ‘니콜라이’는 범상치 않습니다.
“저는 그저 운전수일 뿐입니다”고 거듭 말하지만 머리도, 배짱도, 끈기도 대단한 사람이죠. 그는 ‘세미온’과 ‘키릴’을 대신해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습니다. 그 중에는 ‘안나’를 위협해서 ‘세미온’을 신고하지 못하도록 하는 임무도 포함돼 있죠.

우랄 바이크로 출퇴근하는 안나. 라이더답게 벨스타프로 추정되는 왁스재킷을 언제나 입고 다닌다.
그러나 ‘안나’는 평범하지만 만만치 않은 인물입니다. 감히 마피아에 맞서 아기를 지키려고 하죠.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러시아제 ‘우랄 솔로’ 바이크를 타고 런던의 어두운 거리를 달리는 장면들에서 그의 강한 성품이 엿보이는 것 같습니다. 우랄 바이크는 그저 ‘안나’의 이동 수단에 그치지 않고 ‘니콜라이’와의 연결고리가 돼 주기도 합니다. 시동이 걸리지 않는 바이크 때문에 하필 ‘니콜라이’의 도움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부상당한 ‘니콜라이’를 탠덤하고 달리기도 하거든요.
희망과 파멸의 교차점에서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함께 우랄 바이크로 이동하는 안나와 니콜라이
그리고 ‘니콜라이’가 ‘안나’에게 처음으로 말을 거는 계기도 바이크입니다.
바이크를 타려는 ‘안나’에게 ‘니콜라이’가 “멋진 바이크네요”라고 운을 떼거든요. 모든 라이더가 수백 번은 듣는 말이죠. 둘은 이어서 “요즘 보기 힘든 바이크인데, 얼마에 팔겠느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거라 팔 수 없다”는 등의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인 러시아제 바이크, 그리고 전통을 중시하는 러시아 마피아들의 습성이 묘하게 겹쳐지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애착을 갖고 있더라도 ‘안나’는 아기가 상징하는 희망을 향해 나아가고, 마피아들은 파멸을 향해 달린다는 점에서 참 대조적입니다.

평온한 ‘안나’의 세계와 더러운 폭력으로 가득한 마피아의 세계가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면서 영화의 긴장감도 고조됩니다. 마피아와 폭력에 대한 묘사는 자칫 진부할 수 있지만 매끄럽고도 무게감 있는 연출과 배우들 덕분에 전혀 뻔하지 않게 느껴집니다.
뻔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타티아나’입니다.
‘타티아나’는 영화 초반에 아주 잠깐 등장하지만 일기에 묘사된 그의 희망과 절망이 영화를 이끌어갑니다. 척박한 고향을 떠나왔지만 도저히 저항할 길이 없는 폭력에 희생당한 14살 소녀,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도시의 뒷골목에서 착취당하는 여자들, 카메라는 그 여자들을 건조하게 비춰주는데, 그래서 더 섬뜩합니다.
배우들의 열연

이스턴 프라미스를 촬영하기 위해 바이크를 배운 나오미 왓츠
‘안나’ 역을 맡은 배우, ‘나오미 왓츠’는 영화를 위해 바이크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이크를 타는 대부분의 장면을 직접 찍었다고 하네요. ‘니콜라이’를 탠덤하고 달리는 장면까지도요. 그런데 영화 촬영 기간 중에 임신 12주차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이후로는 대역 배우가 바이크 장면을 찍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나오미 왓츠’는 영화 개봉 후 인터뷰에서 “정말 용감한 건 헬멧도, 보호대도 없이 내 뒤에 탄 비고 모텐슨(니콜라이 역)”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바이크 마니아이기도 합니다. 과거 인터뷰에서 “페라리, 포르쉐, 레인지로버, 아우디 1대씩과 레이싱카 4대, 바이크 5대를 갖고 있다”고 밝힌 적도 있죠. ‘크로넨버그’ 감독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크래쉬(1996년작)’에 얼마나 많은 차가 등장하는지 떠올려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긴 합니다.
이 영화에 끌리신다면, ‘크로넨버그’ 감독과 ‘모텐슨’이 협업한 2005년작 ‘폭력의 역사’부터 보길 추천합니다. 바이크는 안 나오지만 ‘모텐슨’이 인생 최고의 연기를 펼치거든요.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곤 역으로 유명해졌을 때만 해도 그가 연기의 신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1980년대 일본 10대 폭주족들의 이야기, ‘폭음열도’로 찾아뵙겠습니다.
우랄은 어떤 바이크?

러시아 모터사이클 제조사 ‘우랄’은 2차 세계대전에 투입할 군용 바이크를 생산하기 위해 설립됐다.
이때 러시아 정부가 참고한 모델이 BMW의 R71. 영화에서도 ‘니콜라이’가 ‘안나’의 바이크를 두고 “BMW를 모방한 플랫 트윈 바이크”라고 짧게 설명한다. 이 장면을 보면 니콜라이는 상당한 바이크 애호가로 추정되며, 아기를 되찾기 위해 이동하는 급한 대목에서 얌전히 ‘안나’의 뒷자리에 탠덤하는 등 라이더 세계의 규칙(깔면 인수)에도 익숙한 듯 보인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우랄’은 성장을 이어갔다. 러시아의 험한 지형에서는 ‘우랄’ 사이드카의 활용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우랄’은 바이크 전·후륜과 사이드카에 달린 바퀴까지 총 3륜인 데다, 바이크 후륜-사이드카 바퀴의 2륜 구동이 가능해 매우 안정적이라는 평가다. 749cc(41마력, 5.7kg·m)로 사이드카까지 합치면 바이크 무게가 330kg이 넘는다.
‘우랄 솔로’는 사이드카를 뗀 모델이다. 물론 사이드카를 장착할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는 내내 사이드카 없이 등장한다.
글/유주희(서울경제신문 기자)
#한국이륜차신문 #모터사이클뉴스 #이스턴프라미스 #우랄 #우랄솔로
한국이륜차신문 398호 / 2022.3.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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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러시아의 바이크, 우랄
지난번에 ‘이스턴 프라미스’를 ‘바이크 영화’라고 살짝 소개드렸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턴 프라미스’ 에서 바이크는 잊으려면 잊을 수 있을 법한 수준으로만 등장하니까요. 하지만 영화 자체가 워낙 명작인 데다 라이더들이 좋아할 만한 감성이라 소개해 봅니다.
‘이스턴 프라미스’의 무대는 영국 런던입니다. 하지만 주요 인물들은 런던에 뿌리를 내린 러시아 마피아들이죠. 음침한 런던의 분위기, 비정한 마피아들의 세계, 영화 초반부터 등장하는 잔인한 살인 장면 덕분에 ‘무간도’나 ‘신세계’, ‘대부’ 같은 마피아·느와르 영화 마니아라면 단박에 마음에 드실 겁니다.(이하 스포일러 없음).
어쩌다 마주친 마피아의 세계
영화는 주인공 ‘안나’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조산사인 ‘안나’는 러시아인인 아버지로부터 ‘우랄 솔로’ 바이크를 물려받아 타는 클래식 바이크 라이더이기도 합니다.
그는 아기를 낳다 죽은 14살 아이 ‘타티아나’의 일기를 입수하게 됩니다. 러시아어를 못 하는 그는 우연히 러시아 식당 주인인 ‘세미온’을 만나 번역을 부탁하게 되죠. 하지만 ‘세미온’은 ‘타티아나’를 인신매매하고, 성폭행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입니다. 런던 일대 러시아 마피아 조직의 핵심 인물이거든요.
여기서 운전수인 ‘니콜라이’와 ‘세미온’의 아들인 ‘키릴’이 등장합니다. ‘키릴’은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을 아들이지만 머리도, 배짱도, 끈기도 부족합니다. 그런 주제에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픈 열등감만 가득합니다. 그런데 ‘키릴’의 절친이기도 한 ‘니콜라이’는 범상치 않습니다.
“저는 그저 운전수일 뿐입니다”고 거듭 말하지만 머리도, 배짱도, 끈기도 대단한 사람이죠. 그는 ‘세미온’과 ‘키릴’을 대신해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습니다. 그 중에는 ‘안나’를 위협해서 ‘세미온’을 신고하지 못하도록 하는 임무도 포함돼 있죠.
우랄 바이크로 출퇴근하는 안나. 라이더답게 벨스타프로 추정되는 왁스재킷을 언제나 입고 다닌다.
그러나 ‘안나’는 평범하지만 만만치 않은 인물입니다. 감히 마피아에 맞서 아기를 지키려고 하죠.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러시아제 ‘우랄 솔로’ 바이크를 타고 런던의 어두운 거리를 달리는 장면들에서 그의 강한 성품이 엿보이는 것 같습니다. 우랄 바이크는 그저 ‘안나’의 이동 수단에 그치지 않고 ‘니콜라이’와의 연결고리가 돼 주기도 합니다. 시동이 걸리지 않는 바이크 때문에 하필 ‘니콜라이’의 도움을 받게 되고, 나중에는 부상당한 ‘니콜라이’를 탠덤하고 달리기도 하거든요.
희망과 파멸의 교차점에서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함께 우랄 바이크로 이동하는 안나와 니콜라이
그리고 ‘니콜라이’가 ‘안나’에게 처음으로 말을 거는 계기도 바이크입니다.
바이크를 타려는 ‘안나’에게 ‘니콜라이’가 “멋진 바이크네요”라고 운을 떼거든요. 모든 라이더가 수백 번은 듣는 말이죠. 둘은 이어서 “요즘 보기 힘든 바이크인데, 얼마에 팔겠느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거라 팔 수 없다”는 등의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인 러시아제 바이크, 그리고 전통을 중시하는 러시아 마피아들의 습성이 묘하게 겹쳐지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애착을 갖고 있더라도 ‘안나’는 아기가 상징하는 희망을 향해 나아가고, 마피아들은 파멸을 향해 달린다는 점에서 참 대조적입니다.
평온한 ‘안나’의 세계와 더러운 폭력으로 가득한 마피아의 세계가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면서 영화의 긴장감도 고조됩니다. 마피아와 폭력에 대한 묘사는 자칫 진부할 수 있지만 매끄럽고도 무게감 있는 연출과 배우들 덕분에 전혀 뻔하지 않게 느껴집니다.
뻔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타티아나’입니다.
‘타티아나’는 영화 초반에 아주 잠깐 등장하지만 일기에 묘사된 그의 희망과 절망이 영화를 이끌어갑니다. 척박한 고향을 떠나왔지만 도저히 저항할 길이 없는 폭력에 희생당한 14살 소녀,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도시의 뒷골목에서 착취당하는 여자들, 카메라는 그 여자들을 건조하게 비춰주는데, 그래서 더 섬뜩합니다.
배우들의 열연
이스턴 프라미스를 촬영하기 위해 바이크를 배운 나오미 왓츠
‘안나’ 역을 맡은 배우, ‘나오미 왓츠’는 영화를 위해 바이크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이크를 타는 대부분의 장면을 직접 찍었다고 하네요. ‘니콜라이’를 탠덤하고 달리는 장면까지도요. 그런데 영화 촬영 기간 중에 임신 12주차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이후로는 대역 배우가 바이크 장면을 찍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나오미 왓츠’는 영화 개봉 후 인터뷰에서 “정말 용감한 건 헬멧도, 보호대도 없이 내 뒤에 탄 비고 모텐슨(니콜라이 역)”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인 ‘데이빗 크로넨버그’는 바이크 마니아이기도 합니다. 과거 인터뷰에서 “페라리, 포르쉐, 레인지로버, 아우디 1대씩과 레이싱카 4대, 바이크 5대를 갖고 있다”고 밝힌 적도 있죠. ‘크로넨버그’ 감독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크래쉬(1996년작)’에 얼마나 많은 차가 등장하는지 떠올려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긴 합니다.
이 영화에 끌리신다면, ‘크로넨버그’ 감독과 ‘모텐슨’이 협업한 2005년작 ‘폭력의 역사’부터 보길 추천합니다. 바이크는 안 나오지만 ‘모텐슨’이 인생 최고의 연기를 펼치거든요. ‘반지의 제왕’에서 아라곤 역으로 유명해졌을 때만 해도 그가 연기의 신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1980년대 일본 10대 폭주족들의 이야기, ‘폭음열도’로 찾아뵙겠습니다.
우랄은 어떤 바이크?
러시아 모터사이클 제조사 ‘우랄’은 2차 세계대전에 투입할 군용 바이크를 생산하기 위해 설립됐다.
이때 러시아 정부가 참고한 모델이 BMW의 R71. 영화에서도 ‘니콜라이’가 ‘안나’의 바이크를 두고 “BMW를 모방한 플랫 트윈 바이크”라고 짧게 설명한다. 이 장면을 보면 니콜라이는 상당한 바이크 애호가로 추정되며, 아기를 되찾기 위해 이동하는 급한 대목에서 얌전히 ‘안나’의 뒷자리에 탠덤하는 등 라이더 세계의 규칙(깔면 인수)에도 익숙한 듯 보인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우랄’은 성장을 이어갔다. 러시아의 험한 지형에서는 ‘우랄’ 사이드카의 활용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우랄’은 바이크 전·후륜과 사이드카에 달린 바퀴까지 총 3륜인 데다, 바이크 후륜-사이드카 바퀴의 2륜 구동이 가능해 매우 안정적이라는 평가다. 749cc(41마력, 5.7kg·m)로 사이드카까지 합치면 바이크 무게가 330kg이 넘는다.
‘우랄 솔로’는 사이드카를 뗀 모델이다. 물론 사이드카를 장착할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는 내내 사이드카 없이 등장한다.
글/유주희(서울경제신문 기자)
#한국이륜차신문 #모터사이클뉴스 #이스턴프라미스 #우랄 #우랄솔로
한국이륜차신문 398호 / 2022.3.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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