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털어버리고… 형제는 용감했다
영화 감독 웨스 앤더슨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제가 20여 년 전부터 쭉 좋아하던 감독인데 최근에서야 웨스 앤더슨 영화들의 새로운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꽤 높은 비율로 바이크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진 않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마다 바이크가 끼어 있곤 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2007년 영화인 <다즐링 주식회사>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네이버 시리즈온, 웨이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아를 찾는 인도여행
이야기의 배경은 인도입니다. 바이크가 말 그대로 ‘난무’하는 복잡한 인도 거리에서부터 영화가 시작됩니다.
큰형 프랜시스와 둘째 피터, 막내 잭은 인도를 가로지르는 ‘다즐링 주식회사’의 열차 객실 안에서 1년 만에 재회합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장소는 아버지의 장례식장. 셋의 대화를 통해 장례식장 이후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락도 교류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큰형 프랜시스는 얼마 전 자칫하면 사망으로 이어졌을 바이크 사고 때문에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는 정신을 되찾자마자 형제들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나를 찾는 여행’을 기획해 피터와 잭을 불러 모은 것 겁니다.
언뜻 훈훈한 형제들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대화가 시작되자마자 이들이 왜 사이가 좋을 수 없는지 깨닫게 됩니다. 큰형 프랜시스는 동생들의 선택과 행동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피터와 잭도 각자 나름의 까칠함이 있으며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입니다.
투덕거리며 여행을 계속하던 형제는 수녀가 되어 히말라야 수도원에 들어간 어머니를 찾아갑니다. 파워 J인 프랜시스가 미리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뒀지만, 어머니는 바쁘니까 찾아오지 말라는 차가운 답을 회신한 상태입니다. 대체 어떤 집안인지 좀 더 파악할 수 있는 힌트가 있습니다.
형제는 영화 내내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에 유난히 집착합니다. 관련된 대화를 통해 형제가 어렸을 적부터 부모로부터 크게 애정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 성인이 된 현재 타인을 사랑하는 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이크는 역시, 자유다
다행히 영화는 형제가 영원히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형제들은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드디어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찾게 됩니다. 사람이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지만, 인도에서 혼다 CB100에 세 명이 올라타고 달리는 모습은 라이더가 아닌 사람이 보기에도 자유의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조그만 바이크에 셋이 타느라 밀착한 만큼이나 형제의 거리감도 좁혀졌을 겁니다. 셋은 헬멧도 안 썼고, 심지어 막내 잭은 맨발입니다. 현실에선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더 이상 홀가분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 위해 10여 년 만에 영화를 다시 봤습니다. 그동안 저도 많이 변한 만큼, 영화의 감상도 많이 달라졌죠. 좀 더 어릴 땐 신비한 인도를 배경으로 결국 서로를 감싸 안는 형제들의 서사가 따스하게 느껴졌는데, 사회생활 16년 차인 지금은 다소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최강 대국인 미국의 백인들이 인도를 대상화한다는 찝찝함 조금, 같은 이유로 결국 배부른 애정 투정 아닌가 싶은 불만도 조금 생겼습니다.
그런 시각에서 봤을 때 세 형제의 행동들은 확실한 민폐입니다. 주위의 여러 사람을 상처 주고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징징대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영화는 영화이고, <다즐링 주식회사>의 화려한 미장센 속에 숨은 단순한 얼개를 따라가다 보면 나름의 뭉클함이 있다는 점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추운 겨울을 위한 추천작
웨스 앤더슨 감독의 초기 영화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봤던 <로얄 테넌바움>이라든가, 저의 최애 작품인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에는 애정을 갈망하는 인물들이 득실댑니다. <오징어와 고래>에도 그런 부분이 있고요. 물론, 이후의 영화들에선 자기 밖의 세계로 눈을 돌리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우리나라에서 웨스 앤더슨 감독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작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랬습니다. 서로를 구하는 구스타브와 제로와 아가사, 그리고 언제 봐도 대단한 ‘황금 열쇠 연맹’까지. 모래알처럼 드라이한 인물들이 타인을 위해 재빠르게 뭉치고 흩어지는 모습이 이어집니다.
특히 시대 배경에 맞춰 아주 오래된 BMW R11이 등장하는데 고풍스러운 배기음과 함께 설원을 달리는 장관이 펼쳐집니다. 또 다른 작품들에서도 꽤 높은 비율로 바이크가 등장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웨스 앤더슨 감독은 바이크를 평균 이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추측해 봅니다.
20대 시절을 함께 했던 영화들인 탓일까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저는 여전히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특히 주위의 모든 사운드를 꺼버리고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싶어질 때면 그의 영화들이 생각납니다. 바이크를 탈 엄두가 나지 않는 추운 겨울에 조용히 플레이 버튼을 눌러보시길 독자님들께도 권해봅니다.
영화 속 그 바이크
혼다 CB100
CB 시리즈는 혼다의 네이키드·온로드 모델들을 가리킵니다.
배기량이 작은 녀석들은 우리가 익히 아는 클래식 바이크의 디자인을 갖추고 있으며 출퇴근용으로 쓰기 딱 좋게 생겼습니다.
1970년 출시된 99cc 공랭식 4행정 단기통의 이 바이크는 11.5마력을 발휘하는 꽤 강한 녀석이었습니다. 공차중량이 95kg밖에 되지 않아 정말 가볍게 타기 좋은 모델입니다.
유주희(서울경제신문 기자)
#한국이륜차신문 #모터사이클뉴스 #다즐링주식회사 #혼다 #CB100 #웨스앤더슨
한국이륜차신문 440호 / 2023.12.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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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털어버리고… 형제는 용감했다
영화 감독 웨스 앤더슨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제가 20여 년 전부터 쭉 좋아하던 감독인데 최근에서야 웨스 앤더슨 영화들의 새로운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바로 꽤 높은 비율로 바이크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진 않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마다 바이크가 끼어 있곤 했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2007년 영화인 <다즐링 주식회사>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네이버 시리즈온, 웨이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자아를 찾는 인도여행
이야기의 배경은 인도입니다. 바이크가 말 그대로 ‘난무’하는 복잡한 인도 거리에서부터 영화가 시작됩니다.
큰형 프랜시스와 둘째 피터, 막내 잭은 인도를 가로지르는 ‘다즐링 주식회사’의 열차 객실 안에서 1년 만에 재회합니다. 마지막으로 만난 장소는 아버지의 장례식장. 셋의 대화를 통해 장례식장 이후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락도 교류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큰형 프랜시스는 얼마 전 자칫하면 사망으로 이어졌을 바이크 사고 때문에 얼굴에 붕대를 감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는 정신을 되찾자마자 형제들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나를 찾는 여행’을 기획해 피터와 잭을 불러 모은 것 겁니다.
언뜻 훈훈한 형제들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대화가 시작되자마자 이들이 왜 사이가 좋을 수 없는지 깨닫게 됩니다. 큰형 프랜시스는 동생들의 선택과 행동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피터와 잭도 각자 나름의 까칠함이 있으며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입니다.
투덕거리며 여행을 계속하던 형제는 수녀가 되어 히말라야 수도원에 들어간 어머니를 찾아갑니다. 파워 J인 프랜시스가 미리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뒀지만, 어머니는 바쁘니까 찾아오지 말라는 차가운 답을 회신한 상태입니다. 대체 어떤 집안인지 좀 더 파악할 수 있는 힌트가 있습니다.
형제는 영화 내내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품에 유난히 집착합니다. 관련된 대화를 통해 형제가 어렸을 적부터 부모로부터 크게 애정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 성인이 된 현재 타인을 사랑하는 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이크는 역시, 자유다
다행히 영화는 형제가 영원히 고통받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형제들은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드디어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찾게 됩니다. 사람이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지만, 인도에서 혼다 CB100에 세 명이 올라타고 달리는 모습은 라이더가 아닌 사람이 보기에도 자유의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조그만 바이크에 셋이 타느라 밀착한 만큼이나 형제의 거리감도 좁혀졌을 겁니다. 셋은 헬멧도 안 썼고, 심지어 막내 잭은 맨발입니다. 현실에선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더 이상 홀가분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 위해 10여 년 만에 영화를 다시 봤습니다. 그동안 저도 많이 변한 만큼, 영화의 감상도 많이 달라졌죠. 좀 더 어릴 땐 신비한 인도를 배경으로 결국 서로를 감싸 안는 형제들의 서사가 따스하게 느껴졌는데, 사회생활 16년 차인 지금은 다소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최강 대국인 미국의 백인들이 인도를 대상화한다는 찝찝함 조금, 같은 이유로 결국 배부른 애정 투정 아닌가 싶은 불만도 조금 생겼습니다.
그런 시각에서 봤을 때 세 형제의 행동들은 확실한 민폐입니다. 주위의 여러 사람을 상처 주고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징징대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영화는 영화이고, <다즐링 주식회사>의 화려한 미장센 속에 숨은 단순한 얼개를 따라가다 보면 나름의 뭉클함이 있다는 점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추운 겨울을 위한 추천작
웨스 앤더슨 감독의 초기 영화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봤던 <로얄 테넌바움>이라든가, 저의 최애 작품인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에는 애정을 갈망하는 인물들이 득실댑니다. <오징어와 고래>에도 그런 부분이 있고요. 물론, 이후의 영화들에선 자기 밖의 세계로 눈을 돌리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우리나라에서 웨스 앤더슨 감독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작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이 그랬습니다. 서로를 구하는 구스타브와 제로와 아가사, 그리고 언제 봐도 대단한 ‘황금 열쇠 연맹’까지. 모래알처럼 드라이한 인물들이 타인을 위해 재빠르게 뭉치고 흩어지는 모습이 이어집니다.
특히 시대 배경에 맞춰 아주 오래된 BMW R11이 등장하는데 고풍스러운 배기음과 함께 설원을 달리는 장관이 펼쳐집니다. 또 다른 작품들에서도 꽤 높은 비율로 바이크가 등장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웨스 앤더슨 감독은 바이크를 평균 이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추측해 봅니다.
20대 시절을 함께 했던 영화들인 탓일까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저는 여전히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특히 주위의 모든 사운드를 꺼버리고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싶어질 때면 그의 영화들이 생각납니다. 바이크를 탈 엄두가 나지 않는 추운 겨울에 조용히 플레이 버튼을 눌러보시길 독자님들께도 권해봅니다.
영화 속 그 바이크
혼다 CB100
CB 시리즈는 혼다의 네이키드·온로드 모델들을 가리킵니다.
배기량이 작은 녀석들은 우리가 익히 아는 클래식 바이크의 디자인을 갖추고 있으며 출퇴근용으로 쓰기 딱 좋게 생겼습니다.
1970년 출시된 99cc 공랭식 4행정 단기통의 이 바이크는 11.5마력을 발휘하는 꽤 강한 녀석이었습니다. 공차중량이 95kg밖에 되지 않아 정말 가볍게 타기 좋은 모델입니다.
유주희(서울경제신문 기자)
#한국이륜차신문 #모터사이클뉴스 #다즐링주식회사 #혼다 #CB100 #웨스앤더슨
한국이륜차신문 440호 / 2023.12.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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