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9년차 라이더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근처에 20, 30년씩 탄 괴수들이 많아서 여전히 초보같은 기분입니다. 실제로 라이딩 실력도 별로고요. 입문 초기에는 ‘바이크를 제 몸처럼 다루는 n년 후의 나’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근원에는 시트고와 무게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시트고 때문에 산KTM 390 듀크

뭘 무서워해야 하는지도 몰랐던 쌩초보 시절을 벗어난 게 대략 2016년쯤입니다.
어느 정도 소배기량 바이크에 익숙해진 것 같아 좀 더 큰 바이크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BMW모토라드의 C 650, 할리데이비슨 로우라이더, 혼다 NC750X를 시승했죠. 비슷한 시기 가와사키 W800을 기추해서 지금까지도 잘 타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들급 이상의 바이크들은 좀처럼 편하게 느껴지지가 않더군요. 대체로 시트고가 높기 때문입니다. 위에 적은 바이크들 중에서도 로우라이더는 시트고가 680mm에 불과해 너무나도 편했는데 말입니다.
정면 돌파해야겠다 싶어서 시트고가 높은 바이크를 한 대 더 사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시트고가 무섭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타겠다는 계획이었죠. 그래서 배기량도, 가격도 푸근하지만 시트고는 830mm로 꽤 높은 390 듀크를 중고로 샀습니다.
그런데 390 듀크를 어느 정도 타다보니 꽤 탈 만했습니다. 390 듀크의 공차중량은 149kg으로 상당히 가볍습니다. 살짝 삐끗하더라도 제 힘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입니다. 결국 시트고뿐만이 아니라 바이크의 무게도 문제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무거운 바이크라도 로우라이더처럼 시트고가 낮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무거운 데다 시트고까지 높으면 상당히 난처해지는 겁니다.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는 독자 분들도 계시겠죠? 축하드립니다. 독자님은 긴 다리 또는 좋은 근력을 갖고 계십니다.
공포감이 완벽히 사라진 순간

대림 모터스쿨에서의 훈련 모습
여기까지 바이크 탓을 했습니다만 이론적으로는 정면 돌파로 극복해버리면 되는 겁니다.
이제 와서 키를 늘리거나 운동신경을 개선할 수는 없지만 연습을 거듭해서 라이딩 기술을 쌓으면 되는 거죠. 자주 언급했던 바이크 동호회 ‘모토포토’에서 정말 많은 도움을 얻었고 대림 모터스쿨·스페셜라이드를 들락거리며 배움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실력이 좋아졌고 시트고와 무게에 대한 부담감도 어느 정도 옅어졌습니다. 정차할 때 발을 더듬거리지 않게 됐고 코너링의 재미에 빠졌고 유턴도 좀 더 수월해졌습니다.
특히 베트남에서의 경험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코로나19 따위 몰랐던 2017년 12월, 모터사이클 전문 여행사 ‘랩터라이더스’를 통해 2박 3일간 베트남 하노이부터 하장까지 돌고 왔는데요. 투어 첫째 날 저녁 아주 묘한 경험을 했습니다.
두카티 스크램블러62의 라이트에만 의지하며 가로등 하나 없는 산 속 꼬부랑길을 한없이 달리던 중이었습니다. 낮에는 비도 맞았고, 포장 상태가 좋지 않은 길도 거쳤고, 트럭과 사람과 동물들을 피하면서 달리느라 심신이 매우 지쳐 있었죠. 함께 했던 두 괴수님들(모토포토 고문님과 나윤석 칼럼니스트님)도 “역대급으로 힘든 투어”였다고 회고할 정도니까요.

그러다보니 해가 지고 나서는 “빨리 숙소에 도착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평소대로라면 무섭게 느껴졌을 어두운 헤어핀조차 아무 생각 없이 쓱쓱 돌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 겁니다. 너무 지쳐서 무서울 기력도 없어졌거든요.
그 때 깨달았습니다. 시트고도, 무게도, 작은 키와 부족한 근력이나 운동신경보다도 마음속의 두려움이 제일 문제였다는 사실을요. 이후부터는 낯선 바이크를 시승할 때마다, 유턴이 어렵게 느껴질 때마다 베트남에서의 기억을 되새기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습니다.
아직 가야할 먼 길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아닙니다. 한창 모토포토를 따라 어려운 와인딩 코스를 쫓아다니던 시절이 지나고, 곧 다시 문을 열거라던 대림 모터스쿨은 여전히 준비 중이고, 저는 이제 귀찮은 게 제일 싫은 40대가 되었습니다.
원래도 주말형 라이더였지만 타는 횟수가 더 줄었고 대신 당일치기 투어보단 느긋한 박투어를 선호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군산, 태백, 지리산 일대, 거제도, 진도, 경주 등지를 다녀왔습니다.
낯선 동네를 바이크로 설렁설렁 쏘다니는 매력에 빠지다 보니 라이딩 스킬에 대한 욕심도 줄더군요. 형편없는 실력에 가끔 눈물이 날 때도 있지만 말입니다. 특히 지난해, 높고 무거운 할리데이비슨 팬 아메리카를 시승할 땐 깊은 좌절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겁이 많아졌습니다. 9년 동안 큰 사고는 없었지만 자잘한 ‘제꿍’을 꽤 겪었기 때문일까요. 인터넷을 통해 모르는 라이더들의 사망 소식을 종종 들려왔기 때문일까요. 그도 아니면, 정기적으로 들르던 정비숍 사장님이 바이크 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일까요. 제 삶에서 지키고 싶은 게 너무 많아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가끔은 이런 제 모습이 놀랍고 조금 한심하기도 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한다’는 단순한 원칙을 밀어붙이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바이크에 대해선 포기하는 것 같아 실망스럽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무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잘 타고 싶어서 노력했던 이유 중 하나는 ‘잘 타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일 겁니다. 명색이 바이크에 대한 글을 몇 년 썼는데 그래야만 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이젠 별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전국을 바이크로 쏘다니는 즐거움도 충분히 만족스럽고요. ‘여우와 신포도’란 이솝우화가 떠오를 때도 있긴 하지만요.
앞으로의 일은 모릅니다. 언젠가 또 흥이 돋아서, 그리고 시간도 기력도 넘쳐나서 다시 라이딩 스킬에 집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건, 그 때도 즐겁겠죠. 지금도 미래에도 바이크로 인해 즐거우리란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께서도 같은 기분이길 바라겠습니다.
글/유주희(서울경제신문 기자)
유주희 기자
서울경제신문 디지털 뉴스룸 기자, 9년차 라이더. SYM 울프125, KTM 390 듀크, 가와사키 W800을 타며 모터사이클 잡설 ‘두유바이크’를 연재했고 모터사이클 에세이 ‘그동안 뭐하고 살았지, 바이크도 안타고’를 썼다. 현재 서울경제신문에서 뉴스레터 ‘지구용’과 ‘코주부’를 담당하고 있다.
#한국이륜차신문 #모터사이클뉴스 #유주희
한국이륜차신문 400호 / 2022.4.1~4.15
Copyright ⓒ 한국이륜차신문 www.kmnews.net 무단복제 및 전재 – 재배포금지
어느덧 9년차 라이더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근처에 20, 30년씩 탄 괴수들이 많아서 여전히 초보같은 기분입니다. 실제로 라이딩 실력도 별로고요. 입문 초기에는 ‘바이크를 제 몸처럼 다루는 n년 후의 나’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근원에는 시트고와 무게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시트고 때문에 산KTM 390 듀크
뭘 무서워해야 하는지도 몰랐던 쌩초보 시절을 벗어난 게 대략 2016년쯤입니다.
어느 정도 소배기량 바이크에 익숙해진 것 같아 좀 더 큰 바이크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BMW모토라드의 C 650, 할리데이비슨 로우라이더, 혼다 NC750X를 시승했죠. 비슷한 시기 가와사키 W800을 기추해서 지금까지도 잘 타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들급 이상의 바이크들은 좀처럼 편하게 느껴지지가 않더군요. 대체로 시트고가 높기 때문입니다. 위에 적은 바이크들 중에서도 로우라이더는 시트고가 680mm에 불과해 너무나도 편했는데 말입니다.
정면 돌파해야겠다 싶어서 시트고가 높은 바이크를 한 대 더 사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시트고가 무섭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타겠다는 계획이었죠. 그래서 배기량도, 가격도 푸근하지만 시트고는 830mm로 꽤 높은 390 듀크를 중고로 샀습니다.
그런데 390 듀크를 어느 정도 타다보니 꽤 탈 만했습니다. 390 듀크의 공차중량은 149kg으로 상당히 가볍습니다. 살짝 삐끗하더라도 제 힘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입니다. 결국 시트고뿐만이 아니라 바이크의 무게도 문제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무거운 바이크라도 로우라이더처럼 시트고가 낮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무거운 데다 시트고까지 높으면 상당히 난처해지는 겁니다.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는 독자 분들도 계시겠죠? 축하드립니다. 독자님은 긴 다리 또는 좋은 근력을 갖고 계십니다.
공포감이 완벽히 사라진 순간
대림 모터스쿨에서의 훈련 모습
여기까지 바이크 탓을 했습니다만 이론적으로는 정면 돌파로 극복해버리면 되는 겁니다.
이제 와서 키를 늘리거나 운동신경을 개선할 수는 없지만 연습을 거듭해서 라이딩 기술을 쌓으면 되는 거죠. 자주 언급했던 바이크 동호회 ‘모토포토’에서 정말 많은 도움을 얻었고 대림 모터스쿨·스페셜라이드를 들락거리며 배움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실력이 좋아졌고 시트고와 무게에 대한 부담감도 어느 정도 옅어졌습니다. 정차할 때 발을 더듬거리지 않게 됐고 코너링의 재미에 빠졌고 유턴도 좀 더 수월해졌습니다.
두카티 스크램블러62의 라이트에만 의지하며 가로등 하나 없는 산 속 꼬부랑길을 한없이 달리던 중이었습니다. 낮에는 비도 맞았고, 포장 상태가 좋지 않은 길도 거쳤고, 트럭과 사람과 동물들을 피하면서 달리느라 심신이 매우 지쳐 있었죠. 함께 했던 두 괴수님들(모토포토 고문님과 나윤석 칼럼니스트님)도 “역대급으로 힘든 투어”였다고 회고할 정도니까요.
그러다보니 해가 지고 나서는 “빨리 숙소에 도착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평소대로라면 무섭게 느껴졌을 어두운 헤어핀조차 아무 생각 없이 쓱쓱 돌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 겁니다. 너무 지쳐서 무서울 기력도 없어졌거든요.
그 때 깨달았습니다. 시트고도, 무게도, 작은 키와 부족한 근력이나 운동신경보다도 마음속의 두려움이 제일 문제였다는 사실을요. 이후부터는 낯선 바이크를 시승할 때마다, 유턴이 어렵게 느껴질 때마다 베트남에서의 기억을 되새기며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습니다.
아직 가야할 먼 길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아닙니다. 한창 모토포토를 따라 어려운 와인딩 코스를 쫓아다니던 시절이 지나고, 곧 다시 문을 열거라던 대림 모터스쿨은 여전히 준비 중이고, 저는 이제 귀찮은 게 제일 싫은 40대가 되었습니다.
원래도 주말형 라이더였지만 타는 횟수가 더 줄었고 대신 당일치기 투어보단 느긋한 박투어를 선호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군산, 태백, 지리산 일대, 거제도, 진도, 경주 등지를 다녀왔습니다.
낯선 동네를 바이크로 설렁설렁 쏘다니는 매력에 빠지다 보니 라이딩 스킬에 대한 욕심도 줄더군요. 형편없는 실력에 가끔 눈물이 날 때도 있지만 말입니다. 특히 지난해, 높고 무거운 할리데이비슨 팬 아메리카를 시승할 땐 깊은 좌절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겁이 많아졌습니다. 9년 동안 큰 사고는 없었지만 자잘한 ‘제꿍’을 꽤 겪었기 때문일까요. 인터넷을 통해 모르는 라이더들의 사망 소식을 종종 들려왔기 때문일까요. 그도 아니면, 정기적으로 들르던 정비숍 사장님이 바이크 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일까요. 제 삶에서 지키고 싶은 게 너무 많아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가끔은 이런 제 모습이 놀랍고 조금 한심하기도 합니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한다’는 단순한 원칙을 밀어붙이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바이크에 대해선 포기하는 것 같아 실망스럽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무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잘 타고 싶어서 노력했던 이유 중 하나는 ‘잘 타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일 겁니다. 명색이 바이크에 대한 글을 몇 년 썼는데 그래야만 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이젠 별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전국을 바이크로 쏘다니는 즐거움도 충분히 만족스럽고요. ‘여우와 신포도’란 이솝우화가 떠오를 때도 있긴 하지만요.
앞으로의 일은 모릅니다. 언젠가 또 흥이 돋아서, 그리고 시간도 기력도 넘쳐나서 다시 라이딩 스킬에 집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건, 그 때도 즐겁겠죠. 지금도 미래에도 바이크로 인해 즐거우리란 사실만은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독자님들께서도 같은 기분이길 바라겠습니다.
글/유주희(서울경제신문 기자)
유주희 기자
서울경제신문 디지털 뉴스룸 기자, 9년차 라이더. SYM 울프125, KTM 390 듀크, 가와사키 W800을 타며 모터사이클 잡설 ‘두유바이크’를 연재했고 모터사이클 에세이 ‘그동안 뭐하고 살았지, 바이크도 안타고’를 썼다. 현재 서울경제신문에서 뉴스레터 ‘지구용’과 ‘코주부’를 담당하고 있다.
#한국이륜차신문 #모터사이클뉴스 #유주희
한국이륜차신문 400호 / 2022.4.1~4.15
Copyright ⓒ 한국이륜차신문 www.kmnews.net 무단복제 및 전재 – 재배포금지